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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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쓰다 2020. 7. 7. 12:16
아버지여, 정욕적인 세상의 눈으로 밖에 당신의 사랑과 베풀어주신 은혜를 가늠하지 못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교만 대신 겸손이 아닌 열등감으로, 정죄 대신 긍휼과 헤아림이 아닌 자기부정으로 살아갑니다. 번뇌를 회개로 착각하며 죄에 사무친 어둠의 나락에서 빛으로 걸어 나오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가 매사의 사고와 행동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지 못해서 찬양과 감사의 소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내 모습에 대한 비난과 질타만이 진동합니다. 이 땅에서 성실하게 인내와 노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 권리와 자격, 영역을 개척해가듯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방식도 세상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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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쓰다 2020. 7. 3. 12:08
우리 식구들은 우리 중 가장 작은 몸집을 가진 너의 한 뼘도 되지 않는 어깨를 좋아했고 단순하고 한결같은 너의 마음을 사랑했다 발가락 사이 냄새를 맡고 눈곱을 떼어줄 때의 친밀하고 사소한 교감, 그 기쁨 이름만으로도 차오르는 행복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현관문을 열어 온몸으로 반가운 너의 턱을 긁으면 잘 풀리지 않은 하루나 피로가 긁혀 나갔다 가끔 사람이어서 외로울 때 너의 체온은 지혜와 위로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너는 가고 없지만 집안 곳곳에 내 짧은 세월에 진하게 남아있는 잔상들을 더듬어 너와의 시간을 이어나간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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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노래쓰다 2020. 5. 5. 06:17
일조량이 늘어서인가, 창 밖 나뭇가지가 어제보다 더 연둣빛으로 싱그럽게 새 생명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맑게 게인 푸른 하늘이 가슴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해주네요. 봄바람에 흥얼거리듯 춤을 추는 나뭇가지를 보니 그 밑에 잠깐이라도 서서 볕을 쬐고 싶어집니다. 바람의 감촉에 마음을 기울이고 가만히 눈을 감아보고 싶습니다. 꿋꿋한 생명력, 청아하고 풋풋한 에너지를 축복하는 빛이야말로 소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이 아닐까요. 소망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 비추는 빛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나는 오늘의 빛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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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쓰다 2020. 4. 13. 06:57
가본 적 없는 먼 땅의 볕과 바람 들, 꽃의 향기와 흙의 기억을 머금고 진한 향수에 잠긴다 포도주는 그리움에 취한 희생적인 사랑의 기록이다 짓밟히기 위해 일어선 것들의 삶의 수고가 방울마다 짙게 베여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자의 죽기 위해 생명을 바친 한 송이 장미와 같은 자줏빛 사랑을 한 방울의 포도주는 알고 있다 그 사랑으로 목을 축이고 옆에 앉은 사람과 어깨동무를 한다 언젠가 영원한 곳에서 만나자 지금 여기서도 그곳에서처럼 사랑하자 눈물의 다짐을 한다 지평이 노랗게 빛난다 우리의 잔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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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쓰다 2020. 4. 9. 03:13
하나님 나는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촛불 하나도 올린 적이 없으니 날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사람은 별을 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별 사탕이나 혹은 풍선 같은 것을 만들지만 어둠 속에서는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바람개비를 만들 수는 있어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보셨는지요 하나님 바람개비를 든 채 잠들어버린 유원지의 아이를 말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실 때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저 은빛 날개를 펴고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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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표정쓰다 2020. 4. 3. 06:30
우리 집 맞은편 휘어진 굴뚝 뒤로 색종이처럼 파란 대낮을 유유히 가르는 흰 구름 무리 굴뚝을 받치고 있는 벽돌들은 그 움직임에 따라 노르스름해졌다가 희어지길 반복한다 벽돌의 변화하는 빛깔은 오늘의 표정이며 이 지역의 안녕을 알리는 창문 너머의 유일한 현실이므로 안부를 묻듯 그 소식을 계속해서 바라본다 정지해있는 그 풍경과 나 사이가 어딘가 모호해질 때 이따금 나뭇가지는 그곳에 아주 입체적인 차원이 있음을 선포하듯 몸을 흔든다 정지한 것들이 깨어난다 그 사이 긴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벽돌의 민낯이 드러난다 굴뚝에 새 한 마리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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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가는 문쓰다 2020. 3. 25. 03:44
창문 너머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구름에 걸린 앙상한 가지 옅은 봄바람 낮의 온기를 느끼네 그 감각이 무뎌질 즈음 푸른 하늘에 번지는 뜨거운 계절의 기억 좋아하는 사람의 달아오른 콧방울 따뜻하게 식은 와인 반 잔 입안 가득 달콤하게 터지던 토마토의 감촉에 침을 삼키네 어디론가 갈 수 있다면 가겠고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세계를 누비고 계절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것도 벗이 없다면 한낮 꿈 창문 밖은 이제 온통 너의 얼굴 산과 들을 닮은 이마와 연못처럼 비밀스러운 두 눈을 바라보네 입술 사이로 우리의 체온을 머금은 바다가 빛나고 잔잔한 물결이 발끝을 간질이는데 너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 바람 속에 들풀과 꽃 나무와 계절 끝없이 펼쳐지는 생명을 보았네 모든 사랑인 것들을 가지 않고도 만날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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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날쓰다 2020. 3. 10. 08:22
창공에 무리 지어 나는 새 목적 없이 단지 청명한 오늘을 기념하려는 듯 환희로 푸른 하늘을 노 젓는다 절름발이 개가 놀이를 찾아 풀밭에서 뛰고 그를 소중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목덜미가 모든 순수성과 은총을 흡수하듯 눈부시게 빛난다 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도 생명의 기쁨 새 봄날의 의미를 지우지 못하고 살랑이는 꽃무늬 원피스 끝자락 살아있다는 축복을 노래한다 자연과 인간, 동물이 한마음이 되는 지점 솔솔 부는 바람에 실려 그것을 노래한다 새 계절이 온다는 것은 어떤 기적을 말하는가 오늘 빛나는 부활의 솜털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