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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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불안에 대하여쓰다 2020. 2. 12. 13:10
새롭게 시작할 일들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감 일어날 일을 미리 꿰뚫어보려는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 다음 날 개운하게 쉬지 못한 몸을 이끌고 분주하게 나서면 온갖 피로가 가슴 주변에 뭉친 듯이 호흡이 뻐근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것을 막연히 불안이라 착각하는 날이 있다 오늘도 그런 아침을 보내다가 가끔 불안을 귀한 보물함 모시듯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과 맞서거나 합리적인 이유로 잠재우려 하기보다는 불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불안이 원하는 것을 바치는 태도가 마치 불안이 머물러있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애지중지하며 충성스러운 모습이다 불안은 오로지 새로운 불안의 요소를 거쳐 또 다른 불안을 생산하는 식으로 존립한다 자아라는 동굴 속으로 나를 몰아넣는 불안 더는 먹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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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찰나의 균형쓰다 2020. 2. 5. 13:26
멋진 옷과 장신구를 보는 게 즐겁다.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는 인간의 상상력 신이 불어넣어 준 영감과 기술 여럿이 힘을 합해 그것에 기능, 형태와 의미를 주면 누군가 그것을 알아보고 자신의 노동에서 얻은 대가를 떼어 그 가치를 지불한다는 것. 그런 일에 위대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옷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았을 때는 나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적 결함까지도 꾸며 줄 형편에 맞지 않는 것까지 욕심을 냈던 것 같다. 그게 좀 아쉽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세계관과 물질적인 매력에 끌리는 마음이 상호보완하도록 균형감각을 가지고 영원한 것을 사랑하고 아름답고 수고로운 것에 응원과 찬사를 보낼 수 있길.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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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즈를 모른다쓰다 2020. 1. 31. 05:56
나는 재즈를 모른다뭉툭한 손끝으로 현을 퉁기는 연주자의능숙한 손놀림에 바친 세월을 상상하다가진실에 못 미치게 부푼 허구에 눈시울을 붉힌다그들만이 아는 언어로아마 굉장히 재치 있는 의미를 전달한 듯인정과 행복의 미소로 서로 답례하는데그 모습이 좋아서인지나도 모르게 뜻을 알아들은 것인지 같이 웃어버렸다눈치 보던 트럼펫이 길게 한숨을 불면새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피아노의 혈관물러서 있다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자음과 모음들내가 재즈를 모르기 때문에 이 순간을 사랑하는 것인지알아갈 가능성에 대한 소망에 벅찬 것인지언어와 시공간을 초월한 울림이환상적인 빛을 띄고 우리를 통과해가고 있기 때문인지나는 아무래도 재즈를 모르기에아리송하게 손끝만 까딱거리네관객석에 불이 켜지고 아직은 흥분한 얼굴로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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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쓸모쓰다 2020. 1. 25. 04:17
허벅지를 양쪽으로 넓게 벌리고 여유 있게 앉으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는 사내 우편배달부 차림을 하고 있다 미간에 패인 피로와 반달 모양으로 처진 입꼬리 다리 사이 공간을 좁히면서 일그러지던 표정들은 금세 불편은 잊어버린 듯 어딘가 잠긴 듯 모호하다 오늘따라 길에서 누군가 앞을 가로막는 듯한 답답한 생각이 들었는데 사람들의 인상이 펴지는 것을 몰래 관찰하다가 내 짜증이 어디서 왔는가 알 것 같아진다 리듬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었다 살아지는 흐름에는 실수가 없다 내가 실수를 할 수는 있어도 그것까지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데 쓸모 있게 쓰인다 그런 굴곡을 타고 있을 뿐이다 같은 칸에 탄 아이가 울고 있다 코를 훌쩍이는 아저씨가 빈자리에 가서 앉는다 우편배달부는 아직 어디론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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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정 「사랑은 야채 같은 것」쓰다 2020. 1. 25. 04:01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 성미정, 「사랑은 야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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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에 대한 생각쓰다 2020. 1. 17. 14:51
1 사랑의 본질은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감정은 사랑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사랑의 시작이 감정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은 현대사회에서 일컫는 로맨스 혹은 매력에 이끌리는 감정과 더 큰 개념의 사랑을 혼동하는 것이다. 감정에 의존하면 사랑의 행위를 취할 확률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감정과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사랑을 베풀 때 사랑의 참된 미덕을 경험할 수 있다. 2 결혼의 목적은 행복이 아닌 본인의 결점을 직면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성의 변화를 겪으며 진정한 수평적 사랑의 관계를 배워가는 데에 그 뜻이 있다. 배우자의 역할은 상대방이 그러한 변화를 겪어가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지지하며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관계 사이에 맴도는 좋은 기류를 해치지 않고 지내기 위해 받은 상처를 감추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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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 고독에 대하여쓰다 2019. 12. 27. 03:52
True solitude is found in humility, which is infinitely rich. False solitude is the refuge of pride, and it is infinitely poor. The poverty of false solitude comes from an illusion which pretends, by adorning itself in things it can never possess, to distinguish one individual self from the mass of other men. True solitude is selfless. Therefore, it is rich in silence and charity and peace. It f..